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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1차대전 18, 이탈리아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선언

by 회여리 2020. 8. 2.

설상가상으로, 중앙 강대국들은 발칸 반도에서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15년 11월 불가리아와 독일군이 독일군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독일군은 세르비아를 3개국에서 침공해 살로니카로부터 연합군의 도움을 요청 받았다. 세르비아는 Adriatic항구를 통해 탈출하기 위해 겨울 중반에 있는 몬테네그로 산에 걸쳐 전투를 벌인 그녀의 패배한 군대의 잔해에 깔려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거의 희극적인 발기 부전의 상태에 남겨진 살로니카의 연합군에 합류했고 오스트리아인들은 그들이 선호하는 광고에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탈리아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선언했었다. 전쟁에 참여하려는 대단한 열정은 없었다. 터키와의 전쟁으로 인해 재무부는 고갈되었고 산업은 파업으로 마비되었다. 교회와 많은 귀족들은 자유 주의적 서구에 반대하는 카톨릭 오스트리아인들의 대의를 선호했다. 그러나 최종 통일의 전망인 리조르기멘토의 전통은 동맹국들에게 큰 인기를 안겨 주었고, 동맹국들은 오직 세딘에 의해서만 경쟁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영토가 아직도 오스트리아 소유이다. 독일인들은 이것을 하도록 그들의 오스트리아 동맹국들에게 무거운 압력을 가했지만, 비엔나는 당연히 꺼리고 있었다. 결국, 그 전쟁은 군주제를 해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은 오스트리아인들이 패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유일한 적수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5년 5월 비엔나는 마지못해 독일의 압력에 굴복했다. 너무 늦은 4월 26일에 이탈리아인들은 연합국들과 런던의 비밀 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그들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남부 티롤과 이탈리아인들이 있는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의 넓은 지역과 함께,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 모두를 약속 받았다. 소수파-이탈리아인이 전혀 없었던 터키 아나톨리아에서 상당한 몫을 차지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는 전쟁을 선포했고, 그녀의 총 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는 이소노 너머 산에서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하며 거의 백만명의 사람들을 잃었다.  오스트리아 군은 다른 전선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열정으로 그들과 싸웠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이탈리아의 참전은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를 위해, 독일인들, 세르비아와 러시아인들에게 승리를 안겨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했다. 1915년의 도시 분명히 그것은 발칸 반도의 손실과 터키의 손에 의한 그들의 패배에 대해 동맹국들에게 보상해 주는데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합국들 또한 그들의 주요 전선에서 더 나은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그 전략적 구상은 아직도 베를린에 있는데, 특히 매우 유능한 신임 총 참모장인 에리히 폰 팔켄 하인과 함께 있다. 팔켄하인은 명확한 우선 순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독일의 가장 위험한 적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와 더 중요한 영국이 패배하지 않는다면 동맹국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신세계의 경제적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들이 독일에 가는 것을 거부하게 했다. 러시아는 더 이상 즉각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았고, 동부 극장의 순전히 크기 때문에 그 전선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기가 어려웠다. 혼자 남겨졌다면, 팔켄하인은 슐리펜전략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러시아를 잡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하면서 서쪽에서의 결정적인 승리에 집중하는 동시에  하지만 그는 혼자 남겨져 있지 않았다. 독일 국민들에게 이 전쟁의 위대한 영웅들은 이제 타넨베르크 힌덴부르크와 루덴 도르프의 승리자들이었다. 이 가공할 커플은 그들의 극장이 변방으로 축소되는 것을 허락할 의도가 없었으며, 그들은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충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다가, 그들의 비참한 겨울 캠페인 끝에 오스트리아인들은 붕괴 직전에 있었다. 1914년 말 이미 그들은 백만명의 사람과 사 분의 일을 잃었다. 3월까지 그들은 80만명을 더 잃었다. 그 손실은 다국적 군대를 함께 이끌었던 대부분의 전문적인 간부들을 포함했고 체코, 루마니아, 루테네 같은 슬라브 부대들은 집단으로 버려지기 시작했다. 콘래드 자신은 이태리인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와의 별도의 평화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당분간 그의 오스트리아 동맹국을 구하기 위해 서쪽의 방어망에 서서 충분히 동쪽에서 공격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이미 평화를 요구하고 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손을 강화하기 위해 러시아가 졌다. 이를 위해 그는 8월 폰 마켄 손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호주-독일군 조직을 만들어 한스 폰 세크트 대령을 그의 참모로 두고 갈리시아의 러시아 진지를 공격했다. 우리가 찾는 건 이러한 공격은 전쟁의 중반을 특징 짓기 위한 최초의 방법으로 연장되고 집중된 포격의 장막 뒤에서 신중하게 계획된 보병의 공격을 보았다. 그것은 완전한 성공이었다. 10만명의 죄수들이 끌려갔고 러시아 전선은 80마일 깊이까지 뚫고 들어갔다. 그것은 그 자체로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팔켄하인에게 있어서 핵심이 아니었다. 그는 이 새로운 전쟁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점에서, 그 목적은 그 분야에서의 승리라기보다는  자연 감소 였다. 독일의 전략은 이제 그녀의 적들에게 가능한 한 적은 자원을 사용하면서도 그들의 자원을 고갈시키도록 강요하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