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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1차대전 21, 1916년 후방상황

by 회여리 2020. 8. 4.

1915년 말까지 일반적으로 6개월 내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전쟁은 거의 1년 반 동안 지속되었고 더 이상 아무도 신속한 결말을 기대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것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한가지 간단한 대답이 있다. 엄청난 군사적 손실을 견뎌 낼 뿐만 아니라 증가하는 통제력과 어려움을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모든 호전적인 국민들의 지속적인 지지 전쟁의 결과로 모든 곳에서 정부는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도로 시민들의 삶에 권력을 행사했다.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곳에서, 자원 봉사 단체들은 그렇게 했다. 전쟁 발발로 예상되는 금융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보험료는 고정되어 있었고, 정부 대출금은 과다 가입되었고, 인쇄된 통화는 금을 대체했고, 노동력 부족이 치솟았으며 정부 계약은 전례 없는 번영을 만들어 냈다. 비즈니스 클래스의 몇몇 부분 농업인 생산자들은 노동력 부족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았지만, 그들의 생산품에 대한 수요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실제로, 1년 간의 전쟁 후 모든 호전적인 국가들의 인구 중 많은 부분이 이전보다 더 잘 살고 있다. 그러나 1915년 말에 상호 간의 봉쇄는 물기 시작했다. 수출 감소, 물가 상승, 증가하는 지폐의 홍수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급여 계급을 강타했다. 산업을 위한 수입 원자재는 줄어들거나 사라졌다. 봉쇄의 압력과 군대의 요구의 결합은 식량, 연료, 운송의 부족을 초래했다. 그리고 1916년 동안 민간인들은 심각하게 고통 받기 시작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에서 잘 조직되고 응집된 사회가 가장 잘 조화를 이루었다. 사실, 전쟁은 그들을 더 조직적이고 화합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21세기 초 10년 동안 어디서나 정치를 지배했던 자본과 노동자 간의 계급 투쟁은 중단되었다. 노동당 지도자들에게는 행정적, 정치적 책임이 주어졌다. 노동력 부족은 그들에게 새로운 교섭권을 주었다. 대학과 기업인들의 전문가들에 의해 강화된 관료들이 점점 더 많은 국가 생활을 통제했고, 많은 경우에 그것을 절대로 잃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모든 호전적인 유럽 국가들, 심지어 자유 주의적인 영국도 지배 경제가 되었다. 

독일인이나 오히려 프러시안인의 관료 주의는 프 러시아 군대처럼 항상 그 종류의 모델로 여겨졌다. 그것은 전쟁 준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 라이스 뱅크에는 좋은 전쟁 상자가 있었지만, 그것은 민간 전쟁 준비가 진행된 정도였다. 독일이 봉쇄에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전쟁 생산에 필수적인 수입 원자재를 비축하기 위해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았다. 전쟁 사무소가 처음 그의 지도 하에 전쟁 자재 부서를 설립한 것은 오직 큰 전기 결합 AEG의 창시자인 민간인 왈터 라테나우의 주도였다.  동시에 선박 업계의 거물인 알버트 발린은 필수적인 수입품의 구입을 합리화하기 위해 중앙 구매 기관을 설립하는데 앞장 섰다. 이 두 단체는 주로 그들의 활동을 통제하는 사업가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화학 산업인 독일의 화학 산업은 또 다시 섬유, 합성 고무, 니트라이트용 목재 펄프의 대체재 개발에 앞장 섰다. 대기 중에서 합성된 화학 비료나 폭발물 같은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5년 말쯤에는 음식과 옷 둘 다 부족해 지고 있었다. 가격 통제와 가격 통제가 도입되었고 일반적으로 공정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그들의 군대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초라해 지고, 불안해 지고 있었고, 도시에서는 몹시 배가 고픈상태였다.